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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다 나는
소음 때문에 미뤘던 커피머신 디스케일링을 지난 주말에 마침내 했습니다 그 이후로 커피 맛이 좋습니다 장착되어 있는 필터가 너무 오래되어 아예 제거해 버렸는데, 필터 자체가 석회질이 많은 호주의 수돗물을 고려하여 장착된 거라 애초에 한국 수도 환경에서는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필요도 없는 필터를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끼워두고 있었습니다 쿠팡 장바구니에 담았던 필터를 슥 빼 버립니다 어제도 어김없이 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괴상한 꿈은 내가 그 안에 있을 때야 기이하고 곤혹스럽지만 꿈 밖으로 일단 나오고 나면 계속해서 곱씹어보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시 그 꿈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게 만듭니다 왜냐면 그게 꿈이라는 걸 안전장치가 있는 롤러코스터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간밤의 꿈 얘기로..
내가 이 동네 이름을 처음 들었던 건 허니레몬씨가 이 곳 종점에서 카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카페 문에 적혀 있던 문구가 아직도 기억난다. "연휴/공휴일 영업시간: 봐가면서" 나의 고2 시절 낭만에는 커다란 두개의 축이 있었는데 하나는 pH5(파인애플) 그리고 다른 하나가 허니레몬씨였다. 구연산 클럽. 말하자면 두 사람이 내 Ditto 뮤비의 주인공이었다. pH5에 대해서는 앞서 서술한 바가 있으며 허니레몬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므로 일단 여기까지 언니는 이 곳에서 몇년간 카페를 잘 운영했고, 그녀 특유의 유쾌함으로 카페를 하나의 동네 커뮤니티 또는 아지트로 만든 듯 했다. 나는 허니레몬씨의 근황이 궁금할 때면 종종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슬쩍 들어가보곤 했..
나의 머리카락이 오른쪽만 길게 자라 있었다. 심하게 덥수룩한 게 거의 안상규씨의 꿀벌수염 같았다. 아마도 현실에서 오른쪽으로 머리를 자꾸 넘기는 누군가를 인상 깊게 봤던 모양이다. 이병훈 교수님의 예방약학 수업이 만석이었다. 청강생까지 있어 자리가 부족했다. 김나연이 옆에 교복을 입고 서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같이 앉자고 하니 아 괜찮아 괜찮아 하며 웃는다. 맞다. 나연이는 원래 상냥했지. 교복 입은 게 참 예쁜 아이였어. 갑자기 이나래에게 들뜬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학관으로 오라고. 네 생일 파티 중이라고. 나는 이미 먹기 시작한 점심 식판을 치우고 학관으로 가려고 했는데, 먹고 있던 식판을 내려다보니 오동통한 샤인머스캣 포도알만이 가득했다. 20년 전의 목소리들이 왜 그렇게 선명하고 반가웠을까...
겨울산을 네 다리로 기어 올라갔다. 살을 에는 듯 날카로운 겨울 공기가 세상을 덮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땅, 이 땅만큼은 사월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흙은 갓 구워낸 소보로빵 윗면처럼 따스하고도 바슬거렸다.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나는 풀썩, 일생의 임무를 다 마친 사람처럼 쓰러졌는데, 쓰러지는 내 두 팔 사이로 - 나무 하나가 폭 안기듯 들어왔다. 아니 내 두 팔이 한 나무의 밑동을 껴안았다. 밑동에서 땅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한 면에 볼을 대고, 나는 웅크리듯 누웠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나무의 밑동을 꼭 껴안은 채, 나는 땅으로 스며들듯 죽어가고 있었다. 안온하다는 건 이런 거구나. 스르르 눈이 감기려는 찰나, 나무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내 새 EP가 나왔어, 들려줄게. (그때, 나는 나무의 ..
겨울나무 같은 슬픔. 떨구고 떨구고 떨궈내도 아니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도 아직 떨어질 무언가는 반드시 남아 있고한때는 풍성하고 충만했던 자리가 텅 비어 버리고 거대한 바람덩어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통과해 가도, 그저 고개 숙인 채 그 자리에 박혀 떨고 있어야 하는 그런 슬픔. 내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나는 죽고 말거야 - 그 마지막 잎새를 놓아버리고 싶지만 사실은 놓고 싶지 않아서 온 마음에 쥐가 나도록 꼭 붙들고 있는 그런 슬픔. 여기 네가 이만큼 있었는데. 이 한 잎이라도 없으면 그 모든 시간은 뭐였는지.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첩 속 사진 몇 장은 그렇게 남겨두는 거겠지만. 비가 와도 숨을 곳이 없고 얼음보다 차가운 눈이 오면 그 눈을 고스란히 앙상한 가지로 견뎌내야 하는데.
손톱을 바짝, 짧게 깎지 않으면 불안하다. 손톱 머리가 손가락 살 끝을 넘어 삐죽 튀어나오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아니다, 불안하면 손톱을 깎는다.불안한 순간이 오면, 길게 자란 손톱 아래 피부에 갑자기 예리한 신경이 자라난 듯온 감각이 그 최말단에 집중되어 다른 무엇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그래서 다른 손가락들로 그 손톱을 꾹꾹 누르며아니, 그 손톱으로 다른 손가락들을 꾹꾹 찌르며 갈망한다.-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이 불안에서 해방시켜 줄 손톱깎이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검지 손톱을 하나 딱, 딱, 깎아내고 나면, 그 쾌감을 누리기도 전에 - 날이 서 있던 신경이 갑자기 약지로 옮겨가고 그래서 약지 손톱을 깎아내고 나면 그 신경은 다시 엄지로 옮겨가고결국 열 손가락의 ..
아침 일찍 라떼를 만들려다, 우유가 떨어졌길래 마트에 가던 길에 문득 프렌치 토스트가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식빵과 달걀도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마트가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유제품과 달걀 코너로 가서 유통기한이 가장 긴 제품을 찾기 시작했다. ...달걀은 정말 너무 비싸다. 나름 할인마트인데 제일 저렴한 것이 10구에 오천원이다. 동물복지, 자유방목 어쩌구 등등 선량한 이름이 붙은 것들은 만원이 훌쩍 넘는다. 좋은 일이다, 닭의 삶을 생각하는 시대라... 나의 복지는? 흑흑 (자유방목된 프리랜서는 왜 단가가 오르지 않느냐) 결국 오천삼백원짜리 그러니까 하나에 오백삼십원 하는 영양란을 골랐다. 요 앞 라멘집에서 아지타마고 하나 추가할 때 천원을 더 내는 것은 나름..
백룸, 2026-06-09 조조관람 @용산CGV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지워져가는, 혹은 지우고 싶은 기억들 스스로가 그 예정된 소멸에 어떻게든 저항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곳.사라져가는 것들을 어설프고도 선명하게 박제하는 곳 - 비록 눈이 세 쌍이 되고 복도가 위아래로 펼쳐지더라도. 잊혀져 가는, 잊고 싶은 것들의 비바리움.아무래도 슬픈 영화였다 뇌리에 오래 남은 리미널 스페이스 기억나는 대로 메모- 샤이닝, 그리고 그 공간을 닮은 ABaC 지하 라운지- 세브란스:단절- 심포지엄이 끝나고 오래된 호텔의 그랜드볼룸 뒤쪽을 혼자 걷던 순간- 방과 후 교실과 복도- 진료가 끝난 메리놀병원 복도 위에 골든아워가 펼쳐졌을 때- 텅 빈 토요코인 부산역 주차장- 텅 빈 세운상가/진양상가 복도- 아무도 없..
새벽에 마치 황태덕장의 황태가 된 것만 같은 꿈을 꿨다. 나는 찬바람을 맞다가 말다가 맞다가 말다가 하면서 건조되어 가고 있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아까지 한없이 시렸다. 누군가 종이에 나를 말리는 매뉴얼을 써 둔 것을 발견했다. 건조 - (중단) - 건조 - (중단). 단순한 이 사이클이 무한반복되는 프로토콜이었다. 온몸에 도는 날카로운 한기에 잠에서 깨었다. 사방이 스산한 게 냉동 창고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불을 코까지 바짝 끌어당긴 채 다시 잠을 청했는데 새로운 꿈 속에서도 뼛속까지 시렸다. 통증이나 온도 감각도 생생하게 꿈꿀 수 있는걸까...아침에 온전히 잠에서 깨어 나왔을 때는 전혀 몸이 시리지 않았다. 다만 - 아, 냉장고에 말린 가지가 잔뜩 있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1. 최성운 피디님의 추천 영상에 이끌려 시작했던 '저궤도인간' 1부를, 앉은(또는 누운) 자리에서 꽤 긴 시간 다 읽었다. 옐로페이스와 비슷한 플롯이려나, 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그 갈등의 결이 사뭇 달랐다. 옐로페이스에서의 갈등의 기원이 증오심이었다면 저궤도인간에서의 갈등의 기원은 연민(타인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패배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들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수치심인 듯 하다. 창작자든 아니든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그런 감정들을 가혹할 만큼 친절하게 낱낱이 눈앞에 보여주며, 독자들이 그러한 거울상에 괴로워하면서도 종국에는 기꺼이 공범이 되고 싶게 하는 작가님의 힘에 연신 소름이 돋았다. 딱히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한 줄 한 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의미심장한 문장들, 그 밑에 잔뿌..
응급실은 난장판이었고,그는 의식이 없었고,그녀는 울고 있었고,나는 한켠에 숨죽인 채무얼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음이 너무 어지럽게 흔들려서일까갑자기 마음 속에서 탄산 거품 같은 게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올라서그걸 막아낼 도리가 없어서 핸드폰을 켜고 문자를 보냈다 - 사랑해그게 그 아수라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유일한 말이었다는 것이아무래도 다행이었다, 그 밤은 나름대로 무사히 지나갔다 강렬한 공포가 그리움을 부르기도 하는 것일까너무 그리우면 공포도 작은 일이 되어 버리는 걸까